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문단 편집) == 사연댐으로 인한 암각화 멸실 위기 == [[파일:external/www.k-heritage.tv/130521_spe_01.jpg]] 반구대 암각화는 한 나라의 [[국보]]임에도 수몰되어 훼손이 반복된 끝에 멸실될 위기에 '''수십 년째''' 처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반구대 암각화가 위치한 대곡천의 수위가 대곡천 하류에 위치한 사연댐으로 인하여 높아졌기 때문으로, 강우량이 적은 건기에는 수량이 줄어들었다가 강우량이 많아질 때 수위가 급격히 불어나면서 암각화가 물에 잠겨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훼손의 정도는 아주 심각하며, 이미 2009년 당시 문화재청 조사에서 암각화의 훼손 정도는 6단계 중 5단계에 달했을 정도이며[[https://www.khan.co.kr/article/201007070345295|#]] 2016년 조사에서는 이미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그림이 300점 중 30여점도 되지 않는 수준으로 전락해 버렸다.[[https://www.usjournal.kr/news/newsview.php?ncode=1065619744796491|#]]''' 이미 암각화는 훼손을 우려할 시기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걱정해야할 단계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은, [[울주 천전리 각석]]과 반구대 암각화가 신석기 시대에 처음 그려진 이후 역사 속에서 거의 수천년 동안이나 완전히 잊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만 그림이 그려진 신기한 암벽이 있다는 식으로라도 구전되어 내려오던 문화재들은 반고사 터를 탐사하기 위해 내려온 [[동국대]] 문명대 교수 탐사팀에 의해 1970년 천전리 각석이 재조명된 이후 약 1년 뒤 2차 조사에서야 재발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1965년 건설된 사연댐이 이미 가동되고 있는 상황이었고, 당시에는 문화재 보호와 관리에 대한 의식 수준이 무척 낮았기 때문에 암각화가 물에 잠긴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별다른 대처방안이 검토되지 못하고 유야무야되었다. [* [[무령왕릉]] 발굴 당시 [[박정희]]가 발굴된 금팔찌를 손으로 접었다 폈다 해보았다는건 유명한 풍문으로, 당대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을 잘 말해준다.] 때문에 반구대 암각화는 거의 반세기 동안 물에 잠겨 물살에 휘말려 침식되고 풍화되면서 훼손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러한 충격적인 관리 실태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려다 실패했다는 풍문이 있다. 그나마 문화재 보호에 대한 의식 수준이 함양된 00년대에 들어서야 암각화 훼손 문제가 재조명될 수 있었으나, 조사가 반복되면서 이미 암각화의 침식 및 훼손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5363909|#]] 결국 반구대 암각화를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암각화 앞에 물막이 설치, 사연댐의 수위조절, 사연댐 수문 설치 등 여러 가지 방안들이 제시되었으나 대부분 실패하거나 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 해결이 더딘 가장 큰 문제는 사연댐이 울산시민의 식수원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 때문에 울산시는 암각화에 대한 보존 의지보다도 식수원 확보를 더 중요하게 여겨 사연댐의 수위 확보를 가장 우선하여 생각하였고, 그나마 울산시의 전향적인 양보에 의하여 사연댐에 수문 설치가 결정될 수 있었으나, 수문 설치가 오히려 암각화를 보존하기보다 훼손을 촉진한다는 의견까지 나오면서 현재로써는 확실한 방책이 없는 상황이며 암각화가 불과 100년 뒤까지라도 보존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불확실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